'엄마 나 앞으로 2년은 취직 안 해.'
백두산에 다녀왔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줄은 알았는데, 그게 뭘까 영 알 수 없어서 답답했는데 백두산 전경을 보고 나니 바로 떠올랐다. 내가 이 말이 하고 싶어 열차를 두 시간이나 타고 여기까지 왔구나.
왜냐하면 우리 엄마는 만나자마자 무슨 만병통치약처럼 ‘취직’을 꺼내 들었기 때문이다. 우울하단 것도, 불안하단 것도, 여행 가고 싶은 것도 그 밖의 모든 욕망의 해소를 “취직해”로 일축했다.
거기다 ‘너 친구 걔 있잖아’의 취직 상태 보고에 다시 없이 열을 올리기도 했다. 걔들은 왜 다 취직을 해버렸나 몰라.
다행히 꽉 막힌 사람이 아닌 우리 엄마는,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살아라.”
하고 말았다.
그렇게 말하고 마니까 또 속상했다. 그래, 엄마는 단순해서 참 좋겠다. 나는 말을 하면서도, 말을 하고 나서도 이렇게 마음이 갈대 같이 뱅글뱅글 흔들리는데.
뭐 어쨌든 나는 모아 놓은 약간의 돈(세밀히 계산한 결과 2년은 먹고 살 수 있는)을 파먹으며 버틸 수 있고, 부모의 간섭도 없을 예정으로 더없이 편안한 미취업 상태를 보내게 될 것이다.
“취업 안 하고 글을 쓸 거야.”
라고 말하면 주위의 반응은 한결같다.
‘와 낭만적이다’, ‘너는 네 삶을 사는구나’, ‘꿈을 찾아 가는구나.’
이런 식의 낭만화 작업이 일어나면 나는 괜히 부끄럽고, 그들의 감탄에 고마운 동시에 마음이 이상하게 껄끄러워진다. 왜냐하면 그들이 떠올리는 것만큼 나는 어떤 진지한 꿈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더러, 미래에 대한 열의를 품고 있지도 않다.
나에게는 그냥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에 가깝다.
취업을 하지 않는 이유는 사실 단순 명료하다. 회사를 다닐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자기에게 딱 맞는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견딜 수 있는 정도의 일’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말에 동의하는 편이다.
회사 생활을 견딜 수 있다면, 당연히 취업을 선택했을 것 같다. 그런데 나는 회사 생활을 견딜 수가 없다. 나는 대체로 잘 견디고 인내심도 많은 사람이지만 회사 생활만은 그럴 수가 없다. 아주 단호하게 그렇다.
그러니까 나는 견딜 수 없는 것으로부터 도피했다. 글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취업을 하지 않기 위해 글을 쓴다. 나에게 글은 자본 창출을 위한 철저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글에 대한 도구화를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이유가 뭘까. “작가가 내 꿈이야”라고 말할 때의 내가 좋았기 때문일까.
하지만 사실 작가란 직업은 나의 도피처, 회사 바깥에서 돈 벌고, 밥 먹고 살기 위한 방식 정도였다. 꿈이 아니다.
나는 앞으로 2년 동안 고상하거나 우아하지 않게, 치밀하고, 계산적으로, 가끔은 이기적이고, 많은 순간 돈돈거리면서, 탐욕스럽게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아남고 싶다. 다른 이들의 생각처럼 ‘진정한 나의 삶’이란 단어로 고급지게 포장할 수 없는, 현실과 삶 그 자체에 너무 가까워 징그럽기까지 한 꿈.
글쓰기를 업으로 삼기로 결심한 다른 이들은 얼마나 순수하고, 투명할까. 그런 존재가 될 수는 있는 건지, 그런 낭만적 꿈이란 게 가능하긴 한 건지, 회의가 든다.
요즘은 ‘진정성’에 몰두하는 현대인의 가치관을 탐색하는 책을 읽고 있다. 남들이 다 하는 것, 다 가지는 것 말고, 나만의 것을 원하는 마음은 진정성 추구의 한 방향이다.
저자는 젊은 세대가 취업을 선택하지 않는 것 또한 진정성 탐구의 일환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고 반론하고 싶다.
우선 ‘진정한 나’, ‘진정한 삶’ 이런 게 있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특히 그 진정성이란 게 다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손쉽게 쟁취되는 것도 아니다.
즉 남들이 다 취업을 선택하지만, 나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나만을 위한 선택’, ‘주체적인 나’, ‘더 깊은 고민과 결정’, ‘창조적 삶’이 아니란 거다.
모두의 결정은 다 각자만의 서사로 채워져 있고, 그것은 겉보기와 매우 다르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 때문에 “취업 (지금은) 안 할 거야.” 말할 때마다 마음이 껄끄러웠다.
나는 다르지 않다고, 각자의 방식으로 우리는 견딜 수 있는 삶을 찾아간다는 점에서 똑같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싫은 것을 강력하게 거부하겠다는 의지가 내 삶의 추동력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깨닫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 선택의 끝에는 꿈의 실패나 추락 혹은 절망 대신에 또 다른 ‘너무 싫지 않은 다른 것’이 놓여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또 그곳을 향해 갈 수 있다.
싫은 것에서 한 걸음만 물러난 삶, 그 삶을 끈질기게 붙잡는 마음, 그 속에서 새록새록 어떤 꿈이 피어오르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데.
이것은 단지 나의 소망이 아니라 나의 친구들에게 기도해 주고 싶은 문장이다.
어디에 있든 친구들아, 우리 각자의 그곳을 안식처로 만들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