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께
요즘 나는 하루의 많은 시간 중국어로 말하려고 애쓰고 있다. 처음엔 어색하다고 웃기만 하던 친구들도 이젠 중국어로 편안히 소통한다. 그들은 곧 취업을 하거나 중국에 계속 머물러야 하므로 중국어 말하기에 진심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모두 절실하게 중국어를 쓴다.
과거의 나는 하루의 많은 시간을 영어로 말했다. 과거의 나에게 영어는 귀족의 사치품처럼 여겨졌다. 사실은 글쓰기, 운동, 미술을 잘한다는 것과는 다른 선상에 놓인 '고귀한'능력이었다. 특히 영어는 문화자본의 총합이었고, 영어 실력만으로 자신이 부유하고, 교육 수준이 높은 글로벌 인간임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본주의, 백인중심주의, 강대국중심주의에 푹 졀여져 있던 나를 부끄럽게 고백해 본다.
그러므로 "영어를 잘 하고 싶다"라는 단순한 문장 안에는 내 안의 여러 욕망이 겹쳐 있다. 삶의 반경을 넓히고 싶다는 욕망. '똑똑하고 멋져' 보이고 싶다는 욕망. '한국인과 다른 한국인'이 되고 싶다는 욕망. 이러한 보여주기식 욕망으로 가득 찬 나는 영어를 못하는 나를 손쉽게 패배자로 만들기도 하였다.
그렇다. 나는 뒤틀린 욕망을 간직한 채로 종로의 한 영어학원으로 향했다. 나는 나의 지난한 자기혐오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영어'를 거머쥔 것이다. 그리고 학원에 등록한 지 한 달이 흘러서야 나는 영어의 진짜 매력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 후 언어 교환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고 모임 친구들과 함께 저녁을 먹은 어느 날의 일이었다. 다섯 친구의 음식값을 내가 대표로 계산하게 되었다. 나는 "만 원 보내주라~'라는 말이 어색해 친구가 먼저 돈을 보내줄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는 편이다. 어색하다는 이유로 꼭 해야 할 말을 하지 않고 지나가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친구들에게 영어로 돈을 보내달라는 문자를 보내는 건 이상하게 쉬웠다, 깔끔하고, 명확하게!
"Send me the money"
ㅇ과 ~을 붙여 "보내주랑~"하지 않아도 되는 명확한 의사 전달이라니, 나는 일순 자유로움을 느꼈다. 잠시 잊고 있었는데 언어의 가장 큰 기능은 '의사 전달'이 아닌가. 나는 한국에서 나고 자랐다. 때문에 한국어로 '의사전달'을 수행할 뿐 아니라 성격을 형성했다. 나에게 한국어로 말한다는 것은 한국어를 쓰는 내가 된다는 걸 의미한다. 자주 눈치 보고, 나의 잘난 면을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미안하다는 말을 습관적으로 하는 나. 하지만 영어를 쓸 때 나와 조금 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언어라는 언어의 특성 때문이 아니라 그냥 '다른 언어를 쓴다'는 행위가 지니는 의미 같았다.
영어로 대화할 때 나의 말실수는 무례함이 아니라 내 영어 능력의 부족함으로 치부되었다. 그래서인지 난 내 감정 표현이나 요구를 명확하고, 직설적으로 말하곤 했다. 그렇게 해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미안하다"고 말할 상황은 아니지만 어쩐지 미안한 맘이 들 때 "I'm afraid"를 사용한다는 교사의 설명을 듣고 나는 그와 비슷한 한국어 표현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에구구..."가 그것이다. 나는 습관적으로 미안하다고 말하는 대신 울상을 짓고 "에구구.."를 말한다. 내가 표현해 왔던 방식이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내 수동적이고, 애교 섞인 말투의 이상함을 직시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국어를 쓸 때 결국 똑같은 내 말투로 돌아온다. 24년의 기나긴 습관이 바뀔 리 만무하다. 다만 영어를 쓸 때만은 그러고 싶지 않아 부러 내 자랑을 하고 거만한 표정을 짓고, 외향적으로 군다. 나는 새로운 내가 마음에 든다.
회화 공부 N달 차, 내가 발견한 영어의 매력은 이것이다. 멋진 '척'을 할 수 있어서도 아니고, 교포인 '척'을 할 수 있어서도 아니다. 언어를 배우는 것만으로 조금은 다른 나를 갖게 되는 기분. 그래서 나는 영어가 좋다.
2024. 05. 31.
졸업을 앞두고 행복한
B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