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가고 싶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온전히 혼자가 되고 싶었다. 새로운 이름을 짓고 한국인이 아닌 다른 국적의 사람처럼 굴고, 낯선 도시에서 종종 버려진 기분을 감내하고 싶었다. 그리고 한국에 있는 친구와 가족에게는 멋지게 사는 모습을 성실히 전시하고 싶었다.
애석하게도 나는 영어 실력이 형편없다. 그래서 한국에 있는 동안 공인어학 성적 취득에 매달리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하려고... 했다. 하지만 영어 앞에서 치솟는 선택적 의지박약과 함께 자격 미달의 성적을 취득하고 말았다.
다음 시험, 그 다음 시험을 계속해서 볼 수 있었다. 결국 성적을 취득 못한 채
도망치듯 두바이에 가버렸다. 하지만 끝내 나는 버티지 못하고 귀국하고 말았다.
나는 끝내 쟁취하지 못한 것 앞에 지독하다. 두바이에서 6개월이란 긴 시간동안 살아남은 사람들, 곧 떠나는 사람들을 보면 휙 고개를 돌리고, 귀를 틀어막아 버렸다. 지독하게 부러웠기 때문이다. 쓴 양주를 삼킨 것처럼 목울대를 타고 독하게 흐르는 질투심 때문에 견딜 수 없었다.
참 못났다.
그래도 "이게 똥 냄새만큼이나 지독해?" 하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대답을 망설이겠다.
"똥냄새가 너무 지독하다"는 말과 "나는 참 지독한 사람"이라는 말 사이에는 셀 수 없는 간극이 있으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제각각 지독한 면이 있다. 그들의 지독한 면면은 못났지만 귀엽다. 한 꺼풀 벗겨낸 속살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내가 왜 그들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알 것도 같았다.
내 친구 Y는 팬심 앞에 지독하다. '스트레이키즈' 현진의 열혈 팬이다. 팬클럽 회원인 Y는 스트레이키즈 공연 일정이 잡히면 버스를 대절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인다. 고속버스에 사람들을 싣고, 서울, 대전, 대구, 먼 길을 떠난다.
얼마 전 스트레이키즈는 신곡을 발표했고, Y의 집 창고에는 앨범과 포스터가 쌓여 있다. Y는 자기 엄마와 친구, 그리고 나에게 각각 한 장씩 현진 얼굴이 큼지막하게 박힌 포스터를 보내왔다. 그런 Y를 보며 내 친구는 말한다.
"진짜 지독하다 지독해"
친한 동생 J는 돈 앞에 지독하다. J와 연변 여행 마지막 날이 생생히 기억난다. J는 서시장에서 내가 눈여겨 본 바람막이 점퍼 가격을 깎기 시작했다. 나를 위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어깨를 쫙 핀 채 100위안은 더 깎아줄 수 있지 않으냐고 우겼다. J는 결코 상글상글 웃거나 비굴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결국 300위안이었던 바람막이는 160위안이 되었고, J는 당당하게 서시장을 걸어 나왔다. J는 능청에 재능이 없어서 지독함을 무기로 내세웠는지 모르겠다.
지독함이란 이토록 인간적이다.
열 여섯살 때였나, 어느 날과 같이 화장실에서 편하게 볼 일을 보던 중, 갑자기 배가 찢어질 듯 아파왔다. 그 순간 정말 죽는구나 싶어서 미리 유서라도 써두었으면 했지만, 당시에 엄마가 운전을 못했서 엄마 친구가 차를 몰고 나를 동네 병원 내과에 데려다 주었다. 주사를 맞기 직전 나는 빽뺵 소리를 지르며 배를 움켜잡았다. 간호사와 우리엄마는 쓰러지기 직전의 나를 겨우 일으켜 기어코 화장실로 데려갔다. 나는 기절하기 직전까지 울다가 지쳐 잠들 때쯤 주사를 맞을 수 있었다.
내가 가지지 못한 걸 가진 사람 앞에서, 나는 여전히 그 시절의 아이처럼 주저앉아 울고만 싶다. 어린 시절 주사를 다 맞는 나에게 울엄마는 에잇, 지독한 녀석아, 하며 딱밤을 때렸을 텐데 요즘의 나에게 딱밤을 때려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사실이 나를 긴장하게 한다.
나는 영영 두바이에 갈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쩌랴, 그냥 지독하게라도 굴어 본다. 부러운 것들아 잘 가라, 하며. 지독한 표정 한 번 지어준다. 꾸역꾸역 질투심을 처리하며 어떻게든 괜찮은 어른처럼 굴어본다.